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덕 제15호 관리소 (문단 편집) ==== 크기 ==== 안혁[* 정치범으로 요덕 수용소에 3년간 수용됨, 1992년 탈북.]에 따르면 거의 군 하나와 맞먹는 넓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혁명화구역은 입석리, 구읍리, 대숙리에 있으며 이 중 대숙리에는 안혁과 [[강철환]][* 안혁과 강철환은 수용소에서 만난 친구 사이. 친구지간에 살아남은 게 정말 용하다고나 할까. 또한 강철환의 가족도 일본에서 북한으로 자발적으로 돌아왔다가 ''''[[김일성]]의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수용된 케이스.]이 억류되어 있던 마을이 있고 입석리와 구읍리에는 '''[[일본]]에서 자발적으로 돌아온 [[조선적]]들'''이 수용된다고 한다.[* 귀국 동포라고 불렸던 사람들인데 상당수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안명철의 저서인 완전통제구역(2007)에도 남편과 함께 이곳에 끌려온 [[일본인]] 처의 이야기가 나온다. 강철환의 저서인 《수용소의 노래-평양의 어항-》이라는 책에서는 강철환의 할아버지-할머니가 일본에서 [[조총련]] 간부를 지내다가 귀국하였으며, 이후 소설 중에서 이때 북한으로 온 일본인 처들이 조선 사람보다 고생을 덜했기 때문에 수용소에서 빨리 죽는다는 내용의 발언도 있다.] 평전리에는 노동 단련소와 집결소와 완전통제구역이 존재하며 용평리에도 완전통제구역이 있으며 비밀 처형장이 있다고 한다. 강철환의 말에 따르면 구읍리에 있는 시설은 석고 광산과 금광이다. 800명 정도의 남성이 여기에서 일하는데 사고의 위험이 높아서 가장 힘든 일로 간주된다고 한다. 일본에서 자발적으로 돌아온 재일교포나 조선적들의 경우는 양조장에서 일을 한다. 주로 [[옥수수]], [[도토리]], [[뱀술]]을 담근다는 등의 일을 하며, 일부는 구리 세공장에서 일하기도 한다. 또한 [[토끼]]를 길러서 인민군들의 겨울 옷을 만들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땔감이나 인삼을 구하기 위해 산을 오르기도 해야 했다. 참고로 이 금광은 원래 [[일제강점기]] 시대에 있었던 금광이라고. 그리고 강철환이 수용된 마을에는 2~3천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는데 매년 100여 명씩 영양실조와 병, 특히 극심한 설사로 인한 탈수 증세로 인해 숨진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